(좌) 권혜경, <여자의 일생> 연출가 정선아리랑에 마음을 빼앗긴 후 최진실, 신현영 씨와 만나 노래극 <여자의 일생>을 기획하게 되었다.

(우) 남수정, 배우·소프라노 가수 본래 소프라노 가수로, 6년 전 고향 정선으로 돌아와 아라리와 오페라를 결합한 ‘아페라’를 개척했다. 지난 8월부터 <여자의 일생>의 새로운 멤버로 합류했다.



(좌) 신현영, 배우·소리꾼 정선아리랑예술단 출신으로 지난해 11월 칠곡 전국 아리랑 경창대회에서 최고상을 받는 등, 인정받는 젊은 소리꾼 가운데 한 명이다. <여자의 일생>에서 순분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롯한 1인 6역을 맡고 있다.

(우) 최진실,배우·소리꾼 정선아리랑의 매력에 이끌려 정선아리랑예술단에 입단, 지금까지 정선아리랑의 명맥을 잇고 있는 젊은 소리꾼이다.<여자의 일생>에서 엄순분 어머니 역할을 맡고 있다.

인연의 고개 넘어 노래극의 바다로

우정은 힘이 세다. 서로를 진심으로 아끼고 좋아하면,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일들이 거짓말처럼 가능해진다. 그들도 다르지 않다. 위로에서 응원으로, 치유에서 사랑으로. ‘자매애’라는 단어로도 부족한 감정들을 살뜰히 나누면서, 인생이란 고개를 ‘아리누이’들은 함께 넘어가고 있다. 이들에게 나이는 ‘차이’가 되지 못한다. 깊은 공감으로 ‘사이’를 좁혀온 까닭이다. 눈만 마주쳐도 이내 깔깔댄다. 네 사람이 함께 있는 한, 그곳은 이미 새봄이다.
“세 번의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지난 12월 넷이서 제주도로 여행을 다녀왔어요. 매 순간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몰라요. 이렇게 예쁘고 뛰어난 친구들이 나와 ‘놀아줘서’ 정말 고맙고 행복해요.”
원작자이자 연출가인 권혜경 대표(54세)의 말이다. <여자의 일생>은 그의 ‘오지랖’이 낳은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재능 있는 후배들에게 ‘좋은 어른’이 돼주고 싶어, 앞뒤도 재지 않고 사비를 털어 시작한 일이기 때문이다. 2004년 봄, 서울 생활을 접고 정선으로 갓귀촌한 그는 오일장 한 귀퉁이에서 어머니들이 부르는 정선아리랑에 ‘영혼이 흔들리는’ 경험을 했다. 그녀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긴 아라리를 듣는 순간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위로가 폭포수처럼 온몸을 적셔왔다. 그때부터 그의 삶은 온통 정선아리랑과 함께였다. 나물을 뜯으러 간 산속으로, 동네 마을회관으로, 장날 문화예술회관으로…. 곳곳을 찾아다니며 ‘끝없이 이어지는’ 그 민요를 듣고 또 들었다. 그러다 두 친구를 알게 됐다. 정선의 딸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아라리가락과 함께해온 ‘모태 아라리꾼’ 최진실 씨(31세)와, 정선아리랑에 반해 몸살을 앓다 이 땅으로 무작정 날아온 신현영 씨(35세)가 그들이다. 정선아라리가 ‘삶’이자 ‘꿈’인 두 사람은 정선아리랑예술단 출신이다. <전국노래자랑> 정선편에서 구성진 아라리를 선보여 각각 대상과 인기상을 수상한 바 있다. 뛰어난 두 청춘이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제대로 된 ‘판’을 깔아주는 것이 권혜경 대표의 ‘새 꿈’이었다. 거리공연이라도 해보기 위해 세상에 하나뿐인 노래극을 함께 만들기 시작했다. 지난해 5월이었다.
“처음엔 드라마작가와 희곡작가에게 대본을 부탁했어요. 하지만 정선아리랑을 잘 아는 분들이 아니어서 작업에 한계가 있더라고요. 해답은 엉뚱한 데 있었어요. 어느 날 우리 동네 엄순분 어머니의 삶에 대해 듣게 됐는데, 그 순간 ‘이거다’ 싶은 거예요. 떼꾼의 딸로 태어나 화전민으로, 광부의 아내로 살아온 어머니의 일생이 그 자체로 한 편의 극이더라고요. 단숨에 원작을 써내려갔어요. 신예 소설가 이경란 씨가 각색을 맡아주면서 극이 한결 매끄러워졌죠.”
최진실 씨와 신현영 씨는 노래극에 담을 정선아리랑을 직접 선곡했고, 권혜경 대표는 엄순분 어머니의 삶에 맞는 아라리 3곡을 새로 썼다. 젓가락 장단으로 부를 6곡의 트로트도 함께 골랐다. <물새 우는 강 언덕> <낭랑 18세> <앵두나무 처녀>…. 엄순분 어머니의 젊은 날을 환기시키는 오래 전 유행가들이었다. 어느 하나 쉽지 않았지만, 무엇 하나 재미있지 않은 일이 없었다. 정선아리랑으로 창작극 한 편을 함께 만들어갈 뿐인데, 미처 몰랐던 삶의 행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 우리 부모 나를 기를 때 금옥같이 하더니
외딴 골목 절벽 밑에다 왜 나를 두었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즐거운 아라리로 고단한 삶들을 응원하는 꿈

7월에 연습을 시작했고, 8월에 또 하나의 ‘아라리꾼’이 합류했다. 남수정 씨(40세)는 이탈리아에서 유학하고 온 소프라노 가수다. 고향 정선을 떠났다가 6년 전에 돌아온 그는 아라리와 오페라를 결합한 ‘아페라’를 개척해, 정선을 이탈리아 못잖은 오페라의 성지로 이끌고 있다. 넷이 되자 힘이 커졌다. 노래극은 더욱 풍부해졌고, 웃을 일도 훨씬 많아졌다.
“진실 씨, 현영 씨와는 오래 알아온 사이에요. 정선 최고의 축제인 정선아리랑제 때마다 셋이 한 무대에 서곤했거든요. 두 사람의 매니저를 자처해온 혜경 언니와도 내내 친하게 지내왔어요. 그러다 덜컥 엮인 거예요. 어느 날 맥주 한 잔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여자의 일생>에 출연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어요. 너무 멋진 일이라 망설일 이유가 없었어요.”
네 사람의 합숙이 그렇게 시작됐다. 사상 최악의 무더위가 이어졌던 지난여름, 별장으로만 쓰이던 동네 빈집을 빌려 새벽까지 노래연습과 연기훈련을 해나갔다. 최진실 씨는 엄순분 어머니 역을, 신현영 씨는 순분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롯한 1인6역을 맡았다. 애초 오프닝만 맡기로 했던 남수정 씨에겐 순분 아버지의 마음을 앗아간 ‘유학파 기생’역이 맡겨졌다. 연기가 갈수록 늘어 나중엔 마을 사람 역도 그의 몫이 됐다. 권혜경 대표는 세 사람의 식사와 컨디션을 책임졌다. 한 달 반의 꿈같은 동거가 그렇게 지속됐다.
“9월에 첫 무대를 가졌어요. 거리공연을 염두에 두고 시작한 일인데, 연기지도를 해준 박용범 씨가 정식 공연을 강력 추천하더라고요. 여성산악인회 활동을 함께 해온 또 다른 지인이 청담동의 소극장을 무료로 빌려주면서, 서울 한복판에서 <여자의 일생>을 선보일 수 있게 됐죠. 이후 서울에서만 두 번의 공연을 더 했어요. 별 기대 없이 공연장을 찾았던 관객들이, 울다가 웃다가를 반복하며 극속으로 녹아드는데 얼마나 뭉클했는지 몰라요. 공연이 끝나고 돌아갈 땐 정선아리랑을 흥얼거리는 분들이 아주 많았어요. 그때의 감동이 여태 생생해요.”
세 번의 공연 모두 객석과 무대가 하나였다. 특히 관객을 무대 위로 올리는 ‘기생 씬’은 끼 많은 청중들의 재치있는 행동으로 모두를 웃게 했다. 개다리춤을 신나게 추고 내려간 관객도 있고, 소품으로 쓰이는 정선막걸리를 맛나게 마시고 내려간 청중도 있다. 공연이 끝난 뒤엔 정선수리취떡사업단에서 후원한 떡을 모두의 손에 들려줬다. 아리누이와 관객들 사이에 훈훈한 정이 오갔다.
“정선아라리는 정해진 틀이 없어요. 길이를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고, 같은 가사라도 전혀 다르게 해석할 수 있어요. 꾸밈없고 담백한 곡의 특성 덕분에 어떤 장르와도 콜라보가 가능하고요. ‘한’의 민요로 흔히 일컬어지는 정선아라리는 사실 정선사람들이 일의 고됨을 덜기 위해 ‘흥’을 섞어 부르던 노동요예요. 우리 극도 즐거운 아리랑을 표방하고 있어요. 신나게 웃다가 한 번씩 울게 되는 그런
노래극이요. 극 마지막에 정선아리랑으로 합창을 하는데, 여럿이 부르는 하모니가 어마어마한 위로로 다가와요. 불러만 준다면 무료로라도 해외 교포를 위한 공연을 하고 싶어요. 오랜 해외 생활로 외로움이 산처럼 쌓인 분들을 따뜻하고 유쾌하게 위로하고 싶어요.”
<여자의 일생>엔 실제 모델인 엄순분 어머니(76세)가 출연해 처음과 끝을 장식한다. 한 많은 인생의 주인공에서 세상이 흠모하는 ‘배우’로 거듭나면서, 인생 최고의 봄날을 어머니는 살고 있다. 엄순분 어머니가 봄날을 살고 있다면, 네 사람은 봄날을 기다리고 있다. 최고의 노래극이라는 찬사에도 불구하고, 세 번의 공연 이후 다음 공연을 지원하는 손길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있는 건 ‘아리누이 스타일’이 아니다. 기생 씬을 중심으로 한 ‘갈라쇼’를 준비하면서, <여자의 일생> 네 번째 공연을 곧 하게 되길 유쾌하게 기다리고 있다. 아직 갈 길이 먼데도 네 사람은 한껏 신이 나 있다. 함께 넘는 고개엔, 깊은 밤에도 희망의 별빛이 쏟아지는 까닭이다.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오 /

INFORMATION
노래극 <여자의 일생>은 권혜경의 연출가의 이웃인 엄순분 할머니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를 극으로 각색한 것이다. 떼꾼의 딸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하는 바람에 정선 산중의 화전민으로 살게 되었던 이야기, 대추나무집으로 억지 시집을 와 정선탄좌 광원인 남편과 가난 속에서 5남매를 키웠던 이야기를 가슴 절절한 노래와 한데 엮어낸 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