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날 한 데 모여 수수로 빗지락을 매며

수수는 종류마다 특색이 있어 멋도 있고 맛도 있습니다. 수수밥도 해 먹고, 죽도 끓이고, 떡도 해 먹습니다. 수수부꾸미는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습니다. 수수는 소화가 잘 되고, 설사할 때 먹으면 속이 편안해지고 낫습니다. 수수를 훑어낸 빈 이삭으로 빗자루를 만듭니다. 장목수수는 이삭이 길고 크고 부드러우며 노르스름한것이 수수를 털고 나면 껍질이 남아 있지 않고 깨끗하여 방비로 만들어 씁니다.
황달구 씨네 수수밭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을 멈추게 합니다. 가을이 되면 장목수수가 멋들어지게 고개를 쳐들고 바람이 불면 하늘거리며 앉을까 말까 하는 고추잠자리와 함께 춤을 춥니다. 달구 씨네는 농사를 시작하고 여러 가지 농사를 해보았지만 유독 수수농사가 잘돼서 수수농사에 치중하게 되었습니다. 달구 씨네만 수수 농사를 짓다 보니 멀리까지도 소문이 났는지 까치떼가 모여들어 수수 상치를 거의 다 훑어 먹다시피 합니다. 참새 떼는 수수 중간에 앉아서 파먹다가 훠어이 소리지르면 포르륵 날아갔다가 금세 모여와서 파먹습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새 쫓는 품앗이를 부탁해도 가을걷이에 바빠 모두들 다음에 해줌세, 합니다. 부부가 다른 일을 작파하고 수수밭에 새를 쫓습니다. 하도 소리를 질러 목이 다 쉬었습니다.
“내가 올해로 마지막 수수농사다. 내가 다시 수수를 심나봐라. 수수 하면 아주 이빨이 갈린다.” 아내는 한술 더 떠서 “나두 그래. 그놈의 새떼를 쫓다가 나의 맷돌 같던 이빨이 송곳같이 갈렸다.” 합니다.
달구 씨네는 보름날, 마지막 수수 농사니 수수부꾸미도 먹이고 빗지락(빗자루)도 같이 매서 나눠 쓰자고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마당에 멍석을 깔고 장목수수빈 이삭과 까치수수 빈 이삭을 많이 갖다 무집니다. 날씨가 쌀쌀하여 마당 한옆에 구덩이를 파고 작은 황닥불도 준비합니다. “늘 장목수수 빗지락을 매주어서 아쉽잖게 썼는데, 수수 농사를 그만두면 어떡하나.” 동네 사람들은 아쉬운 마음으로 한숨을 쉬면서 달구 씨와 같이 빗자루를 만듭니다.

한 소당에 네 사람씩 앉아서 굽습니다.
두 사람은 반죽을 작은 종제기만큼 떼어
꼭꼭 주물러 손바닥으로 비벼
동그라미를 만들어 줍니다.

소당 위에 그리는 수수 동그라미

동네 아낙네들은 달구 씨 부인과 같이 수수부꾸미 구울 준비를 합니다. 미리 담가 불려 놓은 수수를 디딜방아에 빻아 수수 가루를 만듭니다. 한쪽에선 적두 팥을 삶습니다. 팥은 한소끔 수르르 끓여 물을 따라 버리고 새 물을 붓고 삶아야 팥 특유의 쌉싸름한 맛이 없어집니다. 푹 끓여 팥중간이 툭툭 터지면 물을 따라내고 설탕과 소금을 넣고 물기가 하나도 없이 자칩니다. 잘 삶아진 팥은 여럿이 둘러앉아 잘 주물러 손안에 들어가는 크기로 좀 길쭉하게 빚어놓습니다.
수수 가루는 굳이 끓는 물 반죽을 안 해도 되는데 음식좀 한다는 변씨 아주머니가 물을 끓여서 부꾸미 반죽을 합니다. 반죽이 잘못되면 큰일 난다고 혼자서 맡아 합니다. 수수가루가 든 함지박에 끓인 물을 조금씩 부으며 하는데 물바가지가 손에서 미끄러지며 함지박 속에 푹 쏟아져 죽이 돼버렸습니다. 변씨네 아주머니는 누가 뭐라기도 전에, 아이구 이걸 어떡해 이걸 어떻게 한강이 돼버렸네하며 우는 소리를 합니다. 달구 씨네는 수시로 부꾸미를 해 먹다보니 미리 말려 놓은 수수 가루가 있어 마른 가루 한 바가지를 넣고서야 부꾸미 반죽이 되었습니다. 반죽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한 소당(무쇠솥뚜껑을 뒤집은 것)에 네 사람씩 앉아서 굽습니다. 두 사람은 반죽을 작은 종제기(종지)만큼떼어 꼭꼭 주물러 손바닥으로 비벼 동그라미를 만들어 줍니다. 두 사람은 기름 두른 소당에 치지직 치지직 수수동그라미를 놓고 큰 수저로 눌러 펴 납작하게 굽다가 휘수구레한 반죽이 바알간색으로 변하면 얼른 뒤집어 줍니다. 빚어놓은 팥소를 넣고 반을 접어 반달 모양으로 굽습니다. 이때 너무 바싹 구운 다음에 팥소를 넣고 접으면 접은 자리가 부러져 모양도 안 나고 맛도 없어집니다. 팥죽색으로 잘 구워진 반달 모양의 부꾸미로 금세 채반이 수북해집니다.
졸깃하고 고소하고 달착지근한 수수부꾸미는 뜨끈한 배춧국과 함께 먹습니다. 한참을 맛있게 먹다 보니, 내년에 이 맛있는 수수부꾸미를 못 먹는 게 아쉬워집니다.
“여보게 달구, 우리가 생각 없이 받아 쓰고 받아먹기만 했네, 내년 가을에는 내가 새를 쫓아 줌세.” 합니다. 한 사람이 시작하니 다들 한 마디씩 합니다. “수수밭도 같이 메주겠네.” “수수부꾸미를 먹는 대신 다른 곡식을 갖다 주겠네.” 사람들이 한마디씩 거들자 황달구 씨가 소리칩니다. “해도 해도 너무 하네. 누가 그런 거 바라고 안한다 했겠어요!!”
다시는 안 볼 것처럼 고래고래 소리치며 다들 빗자루나 가지고 빨리 돌아 가버리라고 합니다. 겨우내 달구 씨는 청년들이 모이는 마을 사랑방에 얼씬도 안 합니다. 소리 지른 게 민망스러워서 어쩌다 길에서 사람들을 마주치면 고개를 외로 꼬고 먼 산을 바라보며 지나갔습니다.
그래도 종자씨 수수타레미를 매단 기둥에 쥐가 먹을까봐 밤송이를 엮어 빼곡히 둘러쳤습니다. 달구 씨는 눈앞에 수수밭이 어른거립니다. 사람들이 도와준다고 할 때 못 이기는 척 그럼 한 해만 더 해보겠다고 할걸, 은근히 후회가 됩니다.
에라, 모르겠다. 내가 언제는 사람들 눈치 보고 농사지었나, 내가 언제 사람들 도움 바라고 농사지었나. 아마도 봄이 오면, 달구 씨는 멋진 수수밭만을 생각하며 또 수수 씨를 뿌릴 것 같습니다.

전순예 작가는
1945년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산골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작가를 꿈꿨으나, 먹고사느라 바빠 꿈을 접어두었다가, 환갑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강원도 산골에서 해 먹던 소박한 음식과, 함께 나누어 먹던 사람들, 풍성하고 아름다운 자연을 떠올리며 쓴 글은, 우연한 기회에 ‘강원도의 맛’이란 칼럼으로 시사주간지 <한겨레21>에 연재되었다. 지난 2년간 연재되었던 작가의 글은, 단행본 『강원도의 맛』(송송책방, 2018)으로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