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 글쓰기, 한 잔의 커피, 담배, 눈발, 겨자빛과 붉은 빛이 섞인 밝은 오렌지색, 읽을 만한 책, 상상력을 자극하는 영화, 단순 담백하지만 감칠맛 나는 음식, 온전히 무엇인가에 몰두할 수 있는 나만의 시간, 밝고 따사로운 햇빛, 초록의 식물, 내가 응원하는 팀의 축구경기, 호롱불, 빵 굽는 냄새, 눈, 그대와 마시는 한잔의 흑맥주, 대화, 강원도, 정선, 해남, 강진, 통영, 속초, 진부, 중세풍의 의상, 도서관, 폭설, 고립, 은둔, 다락방, 비밀, 은밀한 생, 신비주의, 연금술, 책을 쓰는 것, 촛불, 질 좋은 종이, 부드러운 천, 그대의 가슴, 따스한 스프, 불란서의 19세기 저물녘 저녁 풍경, 파리, 리스본, 부다페스트, 상트페테르부르그, 그림들, 몇 명의 가수, 노래, 축음기, 라디오, 말, 기타, 지구본, 나침반, 지도, 사진들, 사진기, 조명, 극장, 카페, 물이 끓는 주전자, 부드러운 커튼, 감촉이 좋은 의자, 특별한 상징을 담은 조각상, 각종 포스터, 그대의 미소, 여유로움, 진지한 모습, 그대의 생각, 스미스 코로나 타자기, 짐 자무시, 톰 웨이츠, 벨라 바르톡, 미스터 션샤인의 몇몇 대사, 반가사유상, 밝고 따스한 색깔의 담요, 눈 내리는 정선, 커피 두 잔, 담배 두 대, 눈발, 눈발……

다락방의 창문을 열면 눈이 내려요, 고성, 운치 지나 가수리 북대 다리에, 귤암, 광하 지나 솔치재에, 북실리에, 정선 읍사무소 지나 역전 제재소에, 애산리, 신월리 지나 덕산기, 동면 몰운대에, 광대골에, 대관령 넘어 진부 지나온 눈이 여량에, 구절리에, 덕송리를 지난 눈발이 정선시장에, 시장을 지나 청자다방 뒤편에 있던 낡고 허름한 집의 지붕을 적시며 밤새 눈이 내려요, 눈을 감으면 눈 속으로 눈이 내려요, 눈을 감고 또 다른 눈이 내려요, 눈이 내려 누군가는 밤새 마음의 톱밥난로에 불꽃을 지피며 그대 모습을 떠올려요, 불란서 고아의 지도를 그려요, 설마, 그대가 눈처럼 녹아 어디론가 사라진 건 아니겠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을 적어봤어요, 그리 애틋한 빛깔에 싸인 오랑캐라니, 그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오후, 창밖으로는 눈이 내려요, 가만히 들여다보면 눈 속으로 눈이 내리고 있어요, 눈을 감고 또 다른 눈이 내리고 있어요, 설맹(雪盲), 이런 말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눈이 내리는 오후면 다락방의 창문을 열고 설맹이 되어 눈을 감고 내리는 눈의 음악을 들어요, 글쓰기는 침묵을 유지하면서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파스칼 키냐르는 말하지만, 침묵을 유지하면서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음악은, 이렇게 고요한 오후, 내리는 눈에 가까이 귀를 대고 설맹설맹 내리는 눈의 움직임을 듣는 것이겠지요.

불란서 고아의 지도처럼 눈이 내려요, 뜬금없이 불란서 고아라니, 그대는 강원도 촌놈을 향해 눈을 흘기겠지만 허공에 점점이 흩어져 아직 지상에 닿지 못한 눈의 섬들이 벨라 바르톡의 음악처럼 여전히 차가운 허공을 떠돌고 있어요, 지상에 안착하지 못하는 슬픔들이 감정의 고아들처럼 불란서 고아의 지도처럼 허공에서 펄럭거려요, 그럴 때 허공의 눈들은 바라보는 자의 감정의 임시정부, 하나의 완벽한 추억을 간직한 채 허공을 부유하는, 아직 녹지 않은 기억들, 또 하나의 대륙, 또 다른 세계, 오랑캐의 시

설마(雪馬)는 썰매의 어원인데 눈이 내리는 날이면 설마를 타고 기억의 눈발을 헤치며 그대에게로 가요, 그대와 함께 있던 이 지상의 방 한 칸, 그 아득하고 깊은 방으로 가요, 그대의 입술을 지나온 청포도 같던 말을 한 알 한 알 받아먹어요, 머루처럼 검고 깊던 그대의 눈을 밤새 바라봐요, 눈은 잔인하고도 아름다운 추억의 성분, 눈은 허공에 떠있는 하나의 물질, 누군가의 침묵이 만들어낸 하나의 악보, 눈을 뜨고 허공에 떠있는 눈을 봐요, 눈을 감고 마음의 허공에 떠있는 그대의 눈을 봐요, 그리 애틋한 빛깔에 싸인 오랑캐라니, 그대는 귀엽게 힐난하듯 말하겠지만, 나는 눈을 감고 눈, 불란서 고아의 지도를 그려요, 언젠가 완성될 눈의 지도, 꿈꾸는 눈동자의 지도를 그려요,
그대는 누구인가요, 그래요, 그리 애틋한 빛깔에 싸인 오랑캐라니, 허공에 점점이 떠있는 하얀 대륙들이 아직 식지 않은 찻잔을 향해 이동하는 여기는 어디인가요, 그래요, 눈 내리는 정선, 커피 석잔, 담배 석 대, 눈발, 눈발, 허공에 떠있는 반가사유의 눈발들……

세상의 끝을 보려고 몰운대에 갔었네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사랑보다 더 깊은
눈이 내리고, 눈이 내리고 있었네
강물은 부드러운 손길로 몰운대를 껴안고
그곳에서 나의 그리움은 새롭게 시작되었네
세상의 끝은 또 다른 사랑의 시작이었네
-「몰운대에 눈 내릴 때」中


ABOUT writer
박정대 시인은 강원도 정선에서 태어나 199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했다. 『단편들』, 『그녀에서 영원까지』 등 총 8권의 시집을 꾸준히 냈으며 김달진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글에서 시인은 자신이 나고 자란 정선에서 시작해 불란서와 리스본, 부다페스트로 그리고 다시 정선으로, 눈 쌓인 겨울 시인의 마음 속을 떠도는 다양한 장면들을 포착해냈다.